1. 전쟁 속 피터 가족, 옷장 너머로 들어간 세계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이야기는 현실 세계의 비극적인 상황, 즉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공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골에 있는 외딴 대저택으로 네 남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를 보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낯선 시골 환경과 부모와 떨어진 삶은 두려움과 외로움 그 자체였으며,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 초반부는 판타지의 화려함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이고 서글픈 감정으로 관객을 감싸며 캐릭터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게 만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 루시는 술래잡기 놀이 중 우연히 비밀이 숨겨진 오래된 옷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범해 보이는 옷장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루시는 갑자기 눈밭 위에 서게 되고, 그곳이 바로 마법 세계 ‘나니아’의 입구임을 알게 됩니다. 처음 이 장면을 접하는 관객들은 루시와 함께 ‘현실에서 환상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넘는 듯한 묘한 전율을 느낍니다. 나니아는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하얀 마녀’가 지배하는 곳으로, 사계절 중 겨울만 지속되고 있는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루시는 나니아에서 처음 만난 존재인 포러너스 씨(텀너스)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됩니다. 텀너스는 원래 하얀 마녀의 명령에 따라 인간 아이를 잡아야 했지만, 루시의 순수함과 친절함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를 몰래 도망치게 해 줍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도움의 차원을 넘어서, 선의와 선택, 인간적인 양심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나니아의 존재를 알게 된 루시는 기쁜 마음으로 현실로 돌아와 형제자매에게 이야기를 전하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겪는 ‘진실을 말해도 어른이 믿지 않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루시의 외로움과 순수함이 대비되어 더욱 감정적으로 와닿습니다.
한편, 에드먼드는 루시를 뒤따라 우연히 나니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루시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고, 그 길 끝에서 하얀 마녀를 만나게 됩니다. 마녀는 부드러운 말투와 따뜻한 음식을 이용해 에드먼드를 유혹합니다. 특히 그녀가 건넨 '터키시 딜라이트'라는 과자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권력과 이기심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에드먼드는 점차 마녀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의 형제자매를 배신하게 될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 장면은 어릴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형제자매 간의 경쟁심’을 아주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후 네 남매 모두가 나니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됩니다. 각 인물은 나니아에서의 경험을 통해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가게 되며, 단순한 형제자매 관계를 넘어 진정한 유대와 신뢰를 쌓게 됩니다. 특히 피터는 책임감을 느끼며 리더로서 성장하게 되고, 수잔은 조심성과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조율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루시는 변함없이 순수한 시선을 통해 진실을 꿰뚫어 보는 인물로, 서사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이어갑니다.
한편 에드먼드는 죄책감과 혼란 속에서도 서서히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관계의 진전은 단순한 모험 이상의 서사를 구성합니다. 나니아라는 세계는 환상의 공간이지만, 아이들이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삶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깨달아가는 현실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첫 번째 파트에서는 단지 ‘옷장을 통과해 다른 세계로 간다’는 신비로운 설정을 넘어, 어린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감정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 네 남매의 여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과거 순수했던 시절의 감정과 맞닿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서사의 힘이 바로 『나니아 연대기』가 시대를 초월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2. 아슬란의 등장, 희생과 구원의 메시지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는 단연코 사자 아슬란입니다. 그는 단순히 나니아의 왕이자 영웅이 아니라, 모든 캐릭터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며,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희생과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아슬란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나니아에 들어온 이후, 나니아의 저항 세력과 마법 생물들 사이에서 속삭이듯 전해지는 ‘희망의 상징’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 아슬란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등장하면서 나니아에 커다란 변화가 생깁니다.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변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하고, 오랫동안 겨울에 갇혀 있던 나니아에 봄이 찾아오며 얼어붙었던 강과 나무들이 녹아내립니다.
아슬란은 겉보기에는 무시무시한 맹수지만, 그의 내면은 자비와 공감, 그리고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하얀 마녀처럼 폭력이나 공포로 다스리지 않고, 말없이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지도자입니다. 특히 아슬란은 각 인물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말없이도 많은 것을 이해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작품의 중심 갈등은 에드먼드의 배신으로부터 촉발됩니다. 에드먼드는 마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가족을 배신하고, 결국 그녀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고대의 법칙에 따르면, 배신자는 사악한 존재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마녀는 에드먼드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들과 나니아의 생명체들이 절망에 빠진 그 순간, 아슬란은 마녀와 비밀스러운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곧,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대신해 자신이 죽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가 죄인을 대신해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은, 단순한 영웅적인 희생을 넘어선 종교적·철학적 상징성을 지닙니다. 아슬란은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 대신 침착한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아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이 자신을 볼 수 없도록 조용히 떠나는 모습은 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죽음의 장면은 매우 처절합니다. 마녀와 그녀의 하수인들은 아슬란을 조롱하고, 포박하며, 결국 석판 위에서 그를 찌릅니다. 이를 목격한 루시와 수잔은 절망에 빠지고, 관객 역시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절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대 법칙 너머에는 또 다른 규칙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순수한 사랑으로 남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자는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난다”는 법칙이었습니다. 이 규칙에 따라 아슬란은 부활하며, 다시 한번 나니아를 위해 싸우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슬란의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계가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닌, ‘용서’와 ‘회복’이라는 더 넓은 의미를 포용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에드먼드는 죄를 지었지만, 아슬란의 희생을 통해 다시 태어나듯 새로워지고,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녀의 지배가 ‘두려움과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면, 아슬란의 세계는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것임을 분명히 대비시키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후 벌어지는 전투에서 아슬란은 단순히 적을 쓰러뜨리는 전쟁의 도구가 아닌, 진정한 정의의 구현자로서 전장을 누빕니다. 그는 마녀와의 결전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승리하지만, 그 어떤 오만함이나 복수심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의 싸움은 적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너진 세계를 바로잡기 위함이며, 그 안에는 깊은 책임과 자비가 공존합니다.
또한, 아슬란의 리더십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그는 권력을 쥐고자 하지 않으며, 상황이 정리되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왕좌나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면 물러날 줄 아는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아슬란은 싸움을 통해 얻은 자리를 아이들에게 넘기며, 그들의 성장을 믿고 지켜보는 조력자로 남습니다.
결국, 아슬란의 존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어린이 판타지 영화에서 ‘희생과 회복’, ‘용서와 부활’이라는 깊은 주제를 담은 철학적 서사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어린 관객들은 그를 통해 리더십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되고, 성인 관객들은 우리가 세상에서 지켜야 할 가치들—신뢰, 책임, 공감, 용기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3. 나니아의 변화와 아이들의 성장, 그리고 돌아옴
아슬란의 부활과 하얀 마녀의 몰락 이후, 나니아에는 비로소 진정한 봄이 찾아옵니다. 수백 년 동안 마녀의 마법으로 인해 얼어붙어 있던 나무들은 생명을 되찾고, 숲 속 생명체들은 다시 자유롭게 움직이며, 나니아 전역이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정의와 희망이 다시금 살아난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그동안의 고통과 억압을 이겨낸 나니아는 이제 회복과 재건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죠.
이 변화의 중심에는 네 남매,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나니아를 구한 아이들’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왕과 여왕으로 즉위하여 새로운 나니아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됩니다. 피터는 용기와 결단력으로 전쟁을 이끈 ‘위대한 왕 피터’로, 수잔은 지혜롭고 신중한 ‘자비로운 여왕 수잔’으로, 에드먼드는 잘못을 뉘우치고 정의를 실현하는 ‘공정한 왕 에드먼드’로, 그리고 루시는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나니아에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여왕 루시’로 불리며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단순히 외적인 사건을 해결한 영웅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피터는 처음에는 형으로서 무게감만 안고 있던 인물이지만, 전쟁을 경험하며 진정한 리더로 거듭납니다. 수잔은 소심함과 의심이 많던 초기의 모습에서 벗어나, 상황을 판단하고 이끄는 어른스러운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에드먼드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인물로, 배신과 실수, 용서를 통해 진정한 회복의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루시는 끝까지 순수함을 지키며, 모든 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하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나니아에서 지내며 나라를 평화롭게 통치합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어른이 되어 말 타고 숲을 달리는 장면, 의젓하게 신하들의 조언을 듣는 모습 등이 그려지며 ‘아이들’이 아닌 ‘군주’로서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묘사됩니다. 관객은 이들의 성숙한 모습을 보며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고, 동시에 ‘이제 이 세계에서의 이야기는 끝나가고 있다’는 예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은 사냥 도중 어릴 적 들어왔던 옷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게 되고, 옷장을 통과하면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놀라운 점은, 나니아에서는 수년이 흘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단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설정은 단지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놀라움을 넘어서, ‘경험의 무게는 나이와 무관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이들이 현실에서는 여전히 어리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군주로서의 경험과 책임감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현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다시금 전쟁 중의 아이들로 살아가야 하지만, 이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더 이상 단순히 피난 온 나약한 존재가 아닌, 책임감과 사랑을 아는 존재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부모도, 주변 어른들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아이들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서 성장 서사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특히 이 결말은 관객에게 깊은 아련함을 남깁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르지만, 곧 ‘마음속의 나니아는 실재한다’는 확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나니아는 단순한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때 품었던 이상, 순수함, 용기, 정의와 같은 가치들이 구현된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성장’을 경험한 것입니다.
결국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단순히 시작과 끝이 있는 동화가 아니라, 삶의 본질적인 변화 즉 ‘마주함’과 ‘극복’, 그리고 ‘돌아옴’이라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나니아를 떠났지만, 나니아는 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고,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깁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며 잊고 있던 어떤 마음, 어떤 믿음을 되살려주는 따뜻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